마쓰다 마사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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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 마사히사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으로, 대장대신, 문부대신, 사법대신, 중의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프랑스 유학을 통해 자유주의 사상을 접하고 귀국 후 자유민권 운동에 참여했으며, 나가사키현 의회 의장과 자유당, 헌정당, 입헌정우회 등에서 활동했다. 러일 전쟁 당시에는 의회와 내각의 협력을 위해 노력했으며, 헌정 옹호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온화하고 인망 있는 성품으로 평가받았으며, 1914년 위궤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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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마사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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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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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쓰다 마사히사 (松田正久) |
출생일 | 1845년 5월 17일 (음력 1845년 4월 12일) |
출생지 | 일본 히젠국 오기군 우시즈 (현재 사가현 오기시 (구 우시즈정)) |
사망일 | 1914년 3월 4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부 |
칭호 및 훈장 | 정2위 훈1등 욱일대수장 증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사망 시 승훈) 남작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자유당 →) (규슈개진당 →) (입헌자유당 →) (헌정당 →) (자유파 헌정당 →) 입헌정우회 |
수상 경력 | 제13·16·18대 사법대신 제1차 사이온지 내각 제2차 사이온지 내각 제1차 야마모토 내각 |
재임 기간 (사법대신) | 1906년 1월 7일 - 1908년 3월 25일, 1911년 8월 30일 - 1912년 12월 21일, 1913년 2월 20일 - 1913년 11월 11일 |
수상 경력 (대장대신) | 제7·12대 대장대신 |
내각 (대장대신) | 제1차 오쿠마 내각 제1차 사이온지 내각 |
재임 기간 (대장대신) | 1898년 6월 30일 - 1898년 11월 8일, 1908년 1월 14일 - 1908년 7월 14일 |
기타 경력 | 제12대 중의원 의장 재임 기간: 1904년 3월 18일 - 1906년 1월 19일 제15대 문부대신 제4차 이토 내각 |
문부대신 임기 |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6월 2일 |
중의원 의원 임기 | 1890년 7월 2일 - 1891년 12월 25일, 1898년 8월 11일 - 1914년 1월 19일 |
학력 | |
출신 학교 | 쇼헤이자카 학문소 |
기타 정보 | |
작위 | 남작 |
받은 훈장 | 대훈위 이화대수장 |
2. 생애
마쓰다 마사히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계에서 활동한 인물로, 자유민권 운동 참여를 시작으로 관료 및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자유민권운동이 쇠퇴한 1887년, 정부 내에서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사법대신 야마다 아키요시의 요청으로 사법성 검사가 되었다. 1888년에는 가고시마 고등중학조사관 교두로 취임하였다.
1890년 제1회 총선거에서 사가 지역구로 출마하여 중의원 의원에 당선, 입헌자유당에 참여하였다. 민권파의 중심 인물로 주목받았으나, 같은 해 9월 정부 지지자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1891년 중의원 예산위원장으로서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의 예산안을 폐기시켰지만, 1892년 제2회 총선거에서는 내무대신 시나가와 야지로의 선거 간섭으로 낙선하였다. 1898년 제6회 총선거까지 의석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당내 정책 및 사무에 전념하며 이토 히로부미와 자유당 간의 관계 회복에 힘썼다. 사이온지 긴모치의 중개로 이토와 교류하며 신임을 얻었다.
1898년 헌정당의 오쿠마 내각 성립과 함께 대장대신으로 입각, 직후 제6회 총선거에서 의석을 회복하였다. 헌정당 분열로 내각은 4개월 만에 붕괴되었으나, 이후 구 자유당계 헌정당에 속하여 호시 도루와 함께 이토를 수장으로 하는 신당 결성 운동에 참여했다.
1900년 이토를 총재로 하는 입헌정우회 창당에 참여하여 총무위원으로서 당 조직 편성을 담당, 그 공로로 제4차 이토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903년 사이온지 긴모치가 제2대 총재가 되자, 당무에 미숙한 사이온지를 대신해 당무를 총괄했다. 1904년 러일 전쟁 중에는 제1차 가쓰라 내각과 의회 간 협력 관계 확립에 기여했다. 이후 제1차 사이온지 내각 및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사법대신과 대장대신을 역임하며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다카시와 함께 정우회와 내각을 이끌었고, 형법 개정 및 러일 전쟁 이후 재정 재건에 힘썼다.
헌정 옹호 운동에서 하라 다카시와 함께 중심 역할을 수행,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사법대신으로 입각하였다. 사이온지 긴모치의 정우회 총재 사임 후 후임으로 추천받았으나, 1913년 건강 악화로 사임하였다. 1914년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같은 해 위궤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남작위는 양자인 마쓰다 마사유키(아리마 요리쓰무 백작의 삼남)가 승계하였다.
2. 1. 출생과 성장
히젠국 오기군(小城郡) 우시즈(牛津, 지금의 사가현 오기시)에서 오기번 번사 요코오 다다시치(横尾只七)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 때 같은 번의 번사 마쓰다 유시치(松田勇七)의 양자가 되었다. 마쓰다 가문은 최하급 번사였으며, 부업으로 주조업(일본어 문서: 양조업)을 했다.[1]2. 2. 메이지 유신과 자유민권운동
메이지 유신 이후 쇼헤이자카 학문소에 파견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가 폐지되어 니시 아마네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니시의 추천으로 육군성에 들어가[1], 1872년에는 병학 연구를 위해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에 사이온지 긴모치를 알게 되어, 장래 일본에는 자유주의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데 의기투합하였다. 스위스 로잔에서 학업을 계속한 후에 귀국하여 육군성을 나와 사가에서 자유민권 운동에 참가하였다.1879년에는 나가사키현회 의원, 이후 동 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자유당, 규슈 개진당에 입당했고, 더 나아가 사이온지와 함께 『동양자유신문』을 창간했다.
2. 3. 관료 생활과 정계 입문
1887년 사법대신 야마다 아키요시의 요청으로 사법성 검사가 되었다.[2] 간사이 법률학교(후의 간사이 대학)에서 잠시 강의를 하기도 했다.[2] 1888년 가고시마 고등중학조사관의 교두(教頭)로 취임하였다.1890년 제1회 총선거에서 사가를 기반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입헌자유당에 참가하였다. 민권파의 중심 인물로 주목받아 같은 해 9월에는 정부 지지자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 1891년 중의원 예산위원장으로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이 제출한 예산안을 폐기시켰지만, 제2회 총선거에서 내무대신 시나가와 야지로에 의한 선거 간섭으로 낙선하였다.
1898년 제6회 총선거까지 의석 회복은 안되었지만, 당내의 정책과 사무에 전념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자유당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하였다. 사이온지 긴모치의 중개로 이토와 안면을 익히고 점차 그의 신임을 얻었다.
2. 4. 헌정당과 입헌정우회
1898년 헌정당에 의한 오쿠마 내각이 성립되면서 대장대신으로 입각하였고, 직후의 제6회 총선거에서 의석을 회복하였다.[1] 헌정당 분열로 내각은 불과 4개월 만에 붕괴되었지만, 이후 구 자유당계 헌정당에 속하여 호시 도루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수령으로 하는 신당 결성 운동에 노력하였다.[1]1900년 이토를 총재로 하는 입헌정우회에서는 총무위원으로 당 조직 편성에 힘썼고, 그 공으로 제4차 이토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였다.[1] 1903년 사이온지 긴모치가 제2대 총재가 되면서 당무에 서투른 사이온지를 대신하여 당무를 통괄하였다.[1] 1904년 3월 중의원 의장이 되었다.[1]
2. 5. 러일 전쟁과 그 이후
1904년 3월, 마쓰다는 중의원 의장이 되었다.[5] 러일 전쟁 때에는 제1차 가쓰라 내각과 의회와의 협력 관계 확립에 힘썼다. 제1차 사이온지 내각·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사법대신과 대장대신을 역임하며 사이온지, 하라 다카시와 함께 정우회와 내각을 지탱하고, 형법 개정이나 러일 전쟁 이후의 재정 재건 등에 힘썼다.[5]2. 6. 헌정 옹호 운동과 사망
헌정 옹호 운동에서 하라 다카시와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법상으로 입각하였다.[5] 사이온지 긴모치가 정우회 총재를 사임하고 마쓰다를 후임으로 추천했지만, 1913년 11월에 지병인 위병이 악화되어 요양을 이유로 법상을 사임했다.1914년 1월 19일, 칙사가 파견되어 남작 작위가 수여되었고,[3] 중의원 의원을 사임했다.[4] 같은 해 3월 4일 위궤양으로 사망했다.[5]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3. 성품
고노 히로나카, 사이고 주도와 함께 "요령부득", "너구리 영감"이라고 평해졌지만, 온후하고 돈독한 인품으로 인망을 모았다. 사이온지 긴모치, 호시 도루, 하라 다카시 등 동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묵묵히 지원했다. 하라 다카시는 마쓰다의 능숙한 처세술에 대한 불만을 일기에 적는 한편, 그의 업무 방식을 높이 평가했으며, 사이온지가 차기 총재로 추천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라는 마쓰다의 급사로 인해 후임 총재로 취임했지만,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청렴결백하여 스캔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이온지가 질릴 정도로 구두쇠 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마쓰다가 아타미에 별장을 지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기자가 그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아타미를 방문했을 때, 건물은 서민의 주택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했다. 마쓰다에 따르면, 건강이 나빠져 진찰을 받은 결과 온천 요양을 권유받았지만, 온천 여관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별장을 짓고 온천을 끌어오는 것이 더 저렴하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4. 영전
4. 1. 외국 훈장
1908년 3월 9일 - 대한제국: 이화대훈장5. 가족
양자 마쓰다 마사유키(아리마 요리쓰무 백작의 삼남)가 마사히사의 사후 남작위를 습작했다.[11]
참조
[1]
서적
華族総覧
講談社現代新書
[2]
간행물
関西大学百年史
関西大学百年史編纂委員会
[3]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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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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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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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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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霞会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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